
[뉴스턴=고인영 기자] 더불어민주당이 강력히 추진해온 사법개혁 법안들이 제동에 걸렸다. 야당은 물론 여당 내부와 법조계에서까지 위헌성 논란이 불거지자 민주당이 전격적으로 속도 조절에 나선 것이다.
9일 열린 정기국회 마지막 본회의를 앞두고 우원식 국회의장 주재로 여야 원내대표 회동이 진행됐다. 당초 민주당은 이날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 법왜곡죄 신설, 필리버스터 제한을 위한 국회법 개정안 등을 상정할 계획이었으나, 각계의 반발에 직면하면서 한발 물러섰다.
당내외 ‘위헌’ 우려에 흔들린 與
가장 먼저 제동이 걸린 것은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이다. 전날 민주당 정책 의원총회에서 상당수 의원들이 “졸속 추진”, “헌법 위반 소지”를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영 의원은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전국 법관 대표들이 내란전담재판부 설치에 대해 위헌성 논란이 크고 재판 독립성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입장을 공식 채택했다”고 전했다.
판·검사의 고의적 법 왜곡을 처벌하는 법왜곡죄 신설안 역시 법안 심사 과정에서 사법권 독립 침해 우려가 제기되며 보류됐다. 당내에서는 충분한 의견 수렴 없이 법사위를 통과시켰다는 비판이 나온 상황이다.
범여권인 기본소득당도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용혜인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고 “영장전담판사 구성 시 법무부 장관이 후보자 3인을 추천하는 것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다만 “사법기관의 독립이 국민 감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철옹성은 아니다”며 조건부 찬성 입장도 함께 밝혔다.
필리버스터 제한법도 상정 보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제한을 위한 국회법 개정안 역시 본회의 상정이 미뤄졌다. 이 법안은 필리버스터 진행 중 재적 의원 5분의 1(60명) 미만이 출석할 경우 국회의장이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킬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정애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전날 기자들과 만나 “국회법 개정안은 본회의에 올리지 못할 것 같다”며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만큼 비쟁점 법안 위주로 처리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조국혁신당까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민주당으로서는 강행 처리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풀이된다.
野 “사법정의는 정당의 장난감 아냐”
국민의힘은 이번 사법개혁안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조배숙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사법정의는 특정 정당의 장난감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정청래 대표의 사법실험실이 아니다”라며 “정치적 목적으로 사법체계를 농단한 자는 역사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민의힘은 비쟁점 법안 상정에도 불구하고 필리버스터로 대응할 방침을 세웠다. 최수진 원내수석대변인은 “어떤 법안이 올라오든 필리버스터를 진행할 예정”이라며 민주당이 언제든 쟁점 법안을 기습 상정할 가능性에 대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은 이미 상임위별로 필리버스터 당번 의원을 배치한 상태다.
12월 임시국회서 재추진…정국 긴장 지속
민주당은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최종 결론을 내린다는 계획이다. 법안의 위헌 여부 검토를 위해 로펌에 자문을 의뢰한 상태로, 내란전담재판부의 경우 대통령실과 조국혁신당에서도 위헌 논란을 제기한 만큼 조정 과정을 거쳐 이달 중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정청래 당대표는 전날 “내란전담재판부와 관련해 개인적으로는 위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충분히 소통하고 의견을 모아 부작용이 없도록 하겠다”며 재추진 여지를 남겼다.
9일 본회의에서는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 등 여야가 합의 처리한 민생·비쟁점 법안 70여 건만 처리될 전망이다.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더라도 자정이 넘으면 자동 종료되며, 이후 10일부터 시작되는 임시국회에서 법안들이 일괄 처리될 것으로 보인다.
왜 지금 주목해야 하나
이번 사법개혁안 논란은 단순한 법안 처리 지연을 넘어 한국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여당이 압도적 의석수를 바탕으로 사법부 구조 자체를 재편하려는 시도에 대해, 야당뿐 아니라 여당 내부와 법조계, 범여권까지 제동을 건 것은 이례적이다.
특히 내란 사태라는 초유의 상황에서 사법부의 독립성과 정치적 개입 사이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둘러싼 근본적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헌법적 가치와 정치적 필요성 사이의 충돌은 향후 사법 시스템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민주당은 12월 임시국회에서 위헌성 논란을 보완한 수정안을 재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로펌 자문 결과를 토대로 법안의 위헌 소지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조정 작업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국민의힘은 수정안이 나오더라도 필리버스터를 통해 여론전을 벌이겠다는 입장이어서 연말까지 여야 대치 국면이 지속될 전망이다. 사법개혁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은 내년 정치 일정에도 영향을 미칠 핵심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관측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