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반 16주기 앞두고 공개된 법정스님의 ‘붓장난’

[뉴스턴=고영우 기자] “고독을 배우십시오.” 법정스님이 생전 이해인 수녀에게 보낸 이 문장은 수행자의 고백이자,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건네는 조용한 권면처럼 다가온다. 열반 16주기를 앞두고 공개된 법정스님의 육필 서한과 붓글씨에는, 우리가 알던 ‘무소유’의 엄정함과는 또 다른 따뜻한 인간 법정의 얼굴이 담겨 있다.
서울 성북구 스페이스 수퍼노말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우리 곁에 법정스님 – 붓장난’은 법정스님이 지인과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 90여 편과 선묵 작품 10여 점, 사진과 유품을 통해 그의 일상을 조용히 복원한다. 전시는 길상사에 ‘무소유 문학관’ 건립을 준비하는 작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먹이 남아서”…엄격함 뒤에 숨은 다정함
법정스님은 자신의 붓글씨와 그림을 스스로 ‘붓장난’이라 불렀다. 편지를 쓰다 남은 먹으로 그린 찻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짧은 문장들에는 산중 수행자의 단순한 하루와 고요한 기쁨이 스며 있다.
봉은사 다래헌과 송광사 불일암 시절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책과 차를 보내준 데 대한 감사, 감기 조심을 당부하는 문장, “어느 때고 불쑥 나타나게” 같은 다정한 말들이 남아 있다. 대중 앞에서 냉정해 보였던 법정스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종교를 넘어선 교감…이해인 수녀에게 보낸 편지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해인 수녀에게 보낸 서한이다. 종교는 달랐지만 두 사람을 잇는 공통분모는 ‘수도자의 고독’이었다. 법정스님은 “배부른 상태에서는 고독을 느낄 수 없다”며, 고독이야말로 수행자의 그림자라고 적었다.
이 편지는 이해인 수녀가 힘든 시기마다 다시 읽으며 위안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는 글로,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글씨·사진·의자…법정스님의 삶을 걷다
전시장에는 법정스님이 직접 사용하던 불일암의 ‘빠삐용 의자’ 모형과 함께, 투병 중 침대 위에서 기도하는 모습까지 담긴 사진들도 공개됐다. 제자인 덕조스님이 가까이서 기록한 이 사진들은 수행자의 고독과 인간의 연약함이 공존하는 순간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덕조스님은 “법문은 차가워 보일 수 있지만, 편지와 글씨에는 사람을 어루만지는 온기가 있다”며 “이번 전시는 새로운 법정스님을 만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무소유의 정신, 오늘을 어루만지다
‘붓장난’이라 불린 글과 그림은 결코 가벼운 낙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허물을 보기보다 자신의 게으름을 돌아보라는 조용한 법문이자,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건네는 느린 호흡의 제안이다.
법정스님은 떠났지만, 그의 글씨와 편지는 여전히 묻는다. “당신은 지금, 고독을 견디고 있는가.”
